메이지 유신의 선구자, 텐츄구미(天誅組) 총재 요시무라 도라타로
메이지 24년(1891), 메이지 신 정부와 조정은 메이지 유신에 공헌한 토사의 지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카모토 료마, 다케치 한페이타, 나카오카 신타로, 요시무라 도라타로 등 4명에게 정 4위의 직위를 내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 4명을 토사 사천왕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도라타로는 1837년 요시우노무라(현 츠노쵸 요시우노)의 촌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촌장직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다케치 한페이타와 마사키 소로(데츠마)에게 가르침을 받아, 후에 토사근왕당에도 가입하였습니다.
25세 때, 일번근왕(一藩勤王)을 주장하던 다케치 한페이타와 뜻을 달리하며 탈번하여 쵸슈로 가게 됩니다. 이 일은 토사의 지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사카모토 료마 등 다른 지사들이 뒤를 이어 탈번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863년 교토에서 텐츄구미를 결성하고, 막부 직할지인 야마토고죠와 다카토리성을 공격하며 타도 막부의 기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8월 18일 정변'이 발발하며 고립된 텐츄구미는 세력이 약화되어 마침내 히가시요시노(東吉野)에서 괴멸하였습니다. 도라타로도 히가시요시노까지 텐츄구미를 지휘하였으나, 결국 전사하였습니다. 향년 27세.
도라타로의 전사 소식을 들은 쵸슈의 다카스기 신사쿠는 "나를 아는 이는 많지만, 나의 마음을 아는 이는 요시무라 도라타로와 가와카미 야이치뿐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텐츄구미의 난은 막부를 쓰러뜨리고자 한 그들의 목표를 세상에 알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도라타로는 '메이지 유신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히가시요시노에서 저문 텐츄구미
분큐 3년(1863), 고메이 일왕의 야마토 행행(行幸)에 앞서 나카야마 다다미츠(메이지 일왕의 숙부)가 행행 선봉대를 모집했는데, 이 때 결성된 선봉대가 바로 텐츄구미입니다. 나카야마 다다미츠를 대장으로 하여 요시무라 도라타로, 마츠모토 케이도, 후지모토 뎃세키가 총재 자리에 올랐습니다. 가와치 의당과 도츠카와 의당도 참여하며 1200명이 넘는 부대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17일, 막부 직할지인 고죠의 대관소를 공격, 타도 막부의 기치를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8월 18일, 존왕양이파 대신들과 쵸슈번이 공무합체파인 사츠마번, 아이츠번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된 이른바 '8월 18일 정변'이 발생했습니다. 야마토 행행은 취소되었고, 텐츄구미는 단 하루만에 커다란 조력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타도 막부의 기치에 따르는 동지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카토리성에서 히가시요시노로 옮겨가며 싸움을 이어갔으나, 기슈번과 히코네번, 아이츠번 등의 대군에 패하며 괴멸하였습니다. 나스 신고를 위시한 결사대가 나카야마 다다미츠만은 어떻게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라타로는 9월 24일 와시카구치의 오두막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아이츠번의 군사들에게 붙잡혔고, 할복하기를 바랬으나 끝내 사살되었습니다.
텐츄구미의 병사들은 지역 사람들이 잘 묻어주었으며, 메이지 시대가 된 후에도 묘소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